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지막 황제 (문단 편집) == 비판 및 실제 역사와 다른 점 == 선통제의 삶을 동정하는 시선으로 그려내다보니 너무 과한 미화가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된 후로도 주변 인물에게 화풀이로 한 행위들이 축소되었다.[* 청나라 최후의 환관이였으며, 푸이를 모셨던 환관 순야오팅(孙耀庭)의 증언에 의하면 푸이에 대한 평만은 좋지 못하다. 그나마 푸이는 말년에 편하게 여생을 보냈지만, 순야오팅은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847077205|사찰에서 은둔하며 살다가 1996년 12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히려 주인공이 같은 중국 드라마 말대황제에서 선통제를 (실제보다 다소 순화되긴 했어도) 미화 없이 묘사한 편이다. 물론 그가 어렸을 때부터 궁궐이라는 담장 안에서만 자라와 급변하는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가 크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전 중국의 황제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성인이 된 후에도 주도적으로 다시 중국에 군주제를 복고하기 위해 여러 음모에 참여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마치 납치되어 끌려다니는 무력한 개인처럼 묘사한 것은 본질을 흐리고 미화한 묘사이다. 따라서 전범에 대한 미화 영화라는 비판이 존재하는 이유다. 상당히 담담하게 그려내긴 했지만, 어쨌건 주인공이 선통제이며 영화의 기반이 그의 자서전이다 보니[* 사실 그의 자서전 자체는 중공 치하에서 나온 것이라 자아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나왔다.] 동정어린 시선들이 많이 포함되긴 했다. 실제 역사와 다르거나 핀트가 다른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물론 아래에 있는 내용들을 전부 다 반영하면 러닝타임이 감당이 안될테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 서태후가 푸이 즉위 전에 죽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론 즉위 하루 후에 죽었다. * 섭정왕으로 만청 최후 3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던 순친왕 재풍이 푸이의 즉위 이후로 실종된다. 재풍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까지 살아있었다. * 푸이가 청나라가 망한 줄도 나중에 안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론 위안스카이가 와서 퇴위해야 한다고 아뢰던 상황을 푸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긴 했다. 물론 당시에는 뭔 내용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이후 소조정의 태감들이 위안스카이를 만청의 망탁조의라고 매일같이 그가 얼마나 오만한 역적인가를 푸이에게 아뢰고 씹어대는 통에 푸이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 자리에 앉아 군림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 푸이가 10대 시절에 있었던 핵심적인 사건 중 하나인 홍헌제제와 장훈복벽을 비롯하여 1924년 북경정변을 제외한 민국 정치사와 청나라 소조정의 연계 내용이 다 생략됐다. 이 때문에 청나라 소조정에서 보수적 군벌들과 접촉하여 복벽을 시도하려 했던, 당시 푸이 이하 청나라 소조정의 중요한 성격에 대한 묘사 없이 그저 철모르는 소년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 푸이가 민국 정부에 등을 돌리게 만든 동릉 도굴 사건에 대한 묘사도 잘려나갔다. * 푸이의 만주행과 관련된 천진사변과 그를 전후로 한 국민정부와 푸이의 접촉도 모두 생략됐다. * 푸이의 사부로 만주행 이전 푸이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사부 진보침의 비중이 거의 다 잘려나갔다. 그 유명한 북경여치를 주는 씬에서 인상깊게 등장하긴 하는데 구시대적인 노인네 이상의 비중이 없으며, 만주행을 눈물로 반대한 그의 역할도 생략됨으로 푸이의 만주행도 미화되버렸다. * 가와시마 요시코를 정신나간 요녀로 묘사하는데 요시코가 20세기 중국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특이한 인물인건 사실이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중국 혐오에 미쳐 일본에 헉헉대는 골빈 여자는 아니었다. * 사가 히로의 대접도 애매한데 딱히 작중에서 악행을 저지르진 않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인상이며 푸이가 대놓고 비난을 해댄다. 이는 푸이가 사가 히로가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라고 의심했던 것의 반영이다. * 국무총리 정샤오쉬의 숙청에 대해서 영화에서는 푸이가 일본에 다녀오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론 정샤오쉬와 푸이의 관계도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이었고 푸이도 정샤오쉬 숙청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 후임 총리은 장징후이도 맥없는 예스맨인건 사실이지만 실제 역사보다도 무게 없고 간사하게 나온다. 실제론 중일전쟁 때 일본 측에 전쟁을 중지해달라고 간청하는 등 민족주의 의식이 없진 않았다. * 앞서 언급한 정샤오쉬와 푸이의 관계 악화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고, 영화에도 잠깐 묘사되는 푸이의 방일 비중이 거의 없는데, 푸이의 일본인들에게 이용당하는 억울한 면을 강조하느라 푸이가 히로히토에게 갖은 아첨을 늘어놓으며 비굴하게 군 대목이 다 생략되었다. * 유명한 일화지만 완룽 황후가 낳은 아이는 주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푸이가 아궁이에 던져 죽였다. * 푸이가 만주국 시절에도 복귀인을 비롯한 후궁들을 거느린 사실이 생략되어 마치 순정남처럼 보인다. * 푸이의 일본 탈출 기도 실패도 푸이가 병원에서 돌아온 완룽과 마주치는 다소 극적이면서도 정적인 연출로 보여주는데 실제론 후궁들도 팽개치고 허겁지겁 달아날 정도로 그리 품위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 푸이의 소련 시절도 생략되었는데, 다만 오프닝에서 푸이가 소련에서 오는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련에 있다 왔음을 암시는 한다. 소련 시절이 잘리면서 푸이가 소련에 남겠다고 스탈린에게 애걸했던 내용도 다 생략됐다. * 초반 푸이가 전범 수용소에 수감된 직후 죄수들과 함께 [[동방홍]]을 부르는데, 이건 [[옥에 티]]다. 동방홍은 푸이가 출소한 후인 [[1964년]]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푸이가 출소하는 장면에서 죄수들과 수용소 간부들이 부르는 노래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 가요인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로, 1943년에 공개되었다.] * 푸이의 석방 이후 시절도 다 잘려나갔는데 정협 의원을 지낸 것이라던가, 마오쩌둥을 만난 일,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북경정변 당시 푸이를 자금성으로 끌어낸 군벌장군 녹종린과 신해혁명의 시발점인 무창기의를 일으킨 웅병곤과 만남을 가진 일, 리수셴과 재혼한 일 등이 모두 생략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